달리는 차창 밖 풍경처럼 휙휙 흐르는 도시의 일상… 어떤 게 허상이고 거짓인 걸까요
 
소설가 정이현의 서재 (이미지 출처: 한겨레) 남자들은 알는지 몰라. 여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의 턱밑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부인이, 애인이, 딸이 입을 꼭 다물고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는지 남자들은 모른다. 우리 여자들은 당신들과 다른 색깔로 생각을 한다. 다르게 느끼고 다른 이유로 아프고 다른 느낌으로 외롭다. 굳이 남자, 여자 구분 지어 ‘여자들이 더 섬세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서 10개의 에피소드 중 대개의 주인공이 여자이고, 작가도 여자이고, 책을 읽은 나도 여자인지라, 이 책이 (그리고 지금 내 글이) 좀더 여성의 마음으로 풀어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설 속 대부분 화자들은 닥친 상황을 서로 대화로 풀기 보다, 자신의 마음속 그림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는 듯하다. 그녀들의 그 나직한 마음이 다른 생식기, 다른 뇌 구조를 가진 그들에게는 나와 같은 색깔로 이해돼지는 않을 것이라 나는 섣불리 짐작한다. 남자들도 이 소설이 재미있었는지 안 물어봐서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근래의 드라마가 나한테는 정신을 쏙 빼놓게 재미있는데 (남자 주인공들이 잘생긴 것도 한몫 한다) 내 남자친구에게는 그냥 그런 드라마 중 하나라는 걸 보면 우리는 역시 다르게 생각한다. (매우 주관적이 발언이니 크게 신경쓰지 마시길.)

이 소설은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자들은 모두 요즘을 살고 있다(혹은 살았다). 재벌만치 부자인 주인공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주인공도 없다. 그렇게 구구절절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겪는 사람도 없다. 작다면 작은 사건들.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믿었던 아들이 원조교제를 하기도 한다. 남자친구의 취향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윗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닮은 듯도 하고, 오늘따라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도 같다. 그들은 그렇게 크게 기쁘지도 않고, 엉엉 소리 내어 울만큼 슬프지도 않다. 글 속 화자들은 많은 상황들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지만 애써 자신의 감정을 다 표현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적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숨기며 살고 있다.  연극하듯.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내게 맴도는 단어는 ‘단절’이었다. 우리는 주어진 역할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부인으로 자식으로 학생으로 그 역할에 충실하게 세상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들의 질서를 깨트리고 서로를 난감하게 할지도 모른다. 나도 한번도 그렇게는 안 해봤다. 우리는 이대로 적당한 표정과 행동으로 각자를 감추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함께 그리고 혼자 살고 있다…. 그래서 조금 외롭다면 그건 그냥 참아야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하신 ‘마로우’님은
그림쟁이 마로우. http://blog.naver.com/broadbean
벨을 힘껏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 책 속 밑줄 긋기

한때 가까웠던 누군가와 멀어지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특히 그렇다. (63쪽)

방배동 집에서 T시 외곽의 학교까지, 그 동안 형우가 수없이 오갔을 길이었다. 이 길을 달리면서 현우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89쪽)

유행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유행보다 더디게 지나간다. (254쪽)

가끔 우리 부부의 대화가 텔레비전 단막극 속의 대사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남편이나 나나 일류 배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설픈 삼류도 아니리라 믿는다. (267쪽)

이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 남편은 뭐라고 할까? 나를 스토커 취급할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남자. 나와 그 남자가 어떤 사이인지 내게는 영원히 미스터리였다. (…)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막는 태도가 공동생활에 합당한 지혜라고 믿어왔다. 평화적 거리를 유지하자는 무언의 약속.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격렬한 부부 관계인지도 몰랐다. (279쪽)

문단과 평단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한창 주목받고 있는 작가, 정이현
정이현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여성학과를 수료했으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이 있으며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와 산문집 <풍선>과 <작별>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