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 ‘습지’ 반지하의 방… 21세기 자본주의 청춘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활밀착형 ‘리얼궁상만화’

‘습지’에 사는 등장인물들최규석의 만화는 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일단 그의 그림체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미국만화나 일본만화와 같은 비인간적 신체비율 따위도 없고, 배경 역시 언젠가 한번 가본 듯한 그런 곳이다. 이는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에피소드를 만화로 그려내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지금 소개하는 <습지생태보고서>나 그 밖의 <대한민국 원주민> 등은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으며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역시 취업전선을 목전에 둔 20대인 자신의 현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만화들 속에는 비현실적인 신체비율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캐릭터도 비현실적인 스토리도 없다. 그는 항상 만화 속에 나오는 실제 등장인물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실재에서 비롯하였음을 증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어디서 경험해본 것 같기도 하다. 몰입과 동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만화는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습지생태보고서>는 돈 없고 힘 없고 의욕은 조금, 그렇지만 희망은 많이 가지고 있는, 같은 방을 쓰는 네 명의 대학 친구들과 사슴 한 마리의 일상을 다룬 만화이다. 그들은 그 좁고, 그리고 이 만화의 제목이 그렇게 지어지게끔 일조한 장마철이면 물이 차는 반지하 방에서 지낸다. 젊으니만큼 잘나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욕구도 많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방값을 아끼기 위해 넷이 함께 사는데 뭐 더 볼 것이 있을까? 주워온 옷과 역시 주워온 생활도구들, 생일선물로는 같이 쓸 주전자를 사주고 통닭 한 마리와 케이크 하나면 파티도 충분하다.

다들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주눅 들지는 않았고 오히려 호기로운 배짱(이라고 해봤자 어쩌면 현실도피일 수도 있는 오기)을 부리며 살아간다. 가끔 돈 없는 설움도 당하고 하지만 말이다. 연애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다. 가진 것은 없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계산 없이 좋아해준다. 그러다가 차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위로도 받고…….

그렇지만 저자는 삶이란 어떻게 보면 돈이 있는 자에게든 없는 자에게든 대동소이하다고도 말한다. 모두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 다만 그 무게가 다를 뿐이고 간혹 그 무게의 차이를 ‘고난’이라는 말이 가진 보편성으로 무색하게 만들려는 행위들이 어이없을 따름이지 알고 보면 똑같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결국엔 끊임없이 높은 곳을 동경하게 되며 이러한 부조화로 인해 사람이 ‘쪼잔’해지기도 하고 속물근성을 보이기도 한다.

’01 의태(擬態)’와 ’14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일부 그림 컷이렇게 삶이라는 것, 그 중 젊음이라는 부분은 이렇다 저렇다 말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혹은 굉장히 평범하기도 하며 흔해빠지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는 청소년들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해진 것 없는 인생에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10대나 20대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젊음이라는 것이 지니는 불안함을 공동체 생활(?)과 타고난 낙천으로 극복한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함께했던 많은 추억은 남을 것이다. 이제 같이 살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시절이 그들이 살아가는 데 힘을 줄 수도 있을 테고. 왠지 모르게 이 만화에서 온기가 풍겨 나오는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그 절망적이랄 수 있는 상황에서 희망이 보이고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지닌 ‘긍정의 힘’ 덕분이다.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며 그것이 비록 노스탤지어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뭔가 한 가닥 빛은 있었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삶을 우회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삶을 통과하는 ‘리얼 궁상 만화’(책의 부제)가 발붙일 수 있는 것도…….

오늘의 책을 리뷰한 ‘포비’님은
세상의 모든 지식은 마땅히 공유되어야 하며 지식뿐만 아니라 즐거움, 가능성, 심지어는 생산수단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발칙한 인간입니다. http://blog.naver.com/dkman99
하위 종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 책 속 밑줄 긋기

하위 종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은근히 즐기는 듯도 한 뻔뻔함과 간혹 먹이사슬의 모순을 접할 때면 뒤에서나마 구시렁거릴 줄 아는 비판의식도 갖춘 편이다. 허나… 전반적으로 일관된 서식 양태를 보여주는 듯하다가도 이종(異種)으로서의 의태(擬態)가 가능한 상황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양식이 돌변하기도 한다. - #1 ‘의태’

밤새 꺼지지 않는 형광등, 방 안 가득 자욱한 담배연기, 때에 절은 이불, 빈틈없이 들어찬 짐들, 누군가는 비참이라 말하지만 세상의 번잡함과 호화로움에 눈 돌리지 않는 친구들과 나를 이 땅에 서게 해 주는 소중한 꿈이 있으니 혹 내 생활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슬퍼할 일은… 슬퍼할 일은… 잘 데가 없다! c8… 성공하자! 지평선이 생성되는 방에서 매일매일 천 바퀴씩 굴러다녀 줄 테다! - #14 ‘안분지족’

주인 없는 잔치에 휘황하게 불만 밝힌 곳이나 설움이 쌓이다 미움으로 뒤집어지는 곳에도 당신의 근심과 사랑이 함께 하소서. - #31 ‘알바 TWO’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 가지는 더 댈 수 있을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 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 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겠지? - #54 ‘그렇겠지?’

데뷔 후 각종 만화 시상식을 휩쓸어온 주목받는 만화가, 최규석
최규석
197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상명대학교 만화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본격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에 작품을 연재하면서 차세대 대표 만화가로 자리잡았다. 2003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초청돼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았고, 2004년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 단편상,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등을 수상했다. 펴낸 책으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등이 있으며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