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변화상은 이른바 시대적 유행이라는 풍속의 그릇에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정겨운 우리 그림, 음식, 역사
대쾌도 大快圖. 유숙, 지본채색, 105X54㎝,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24쪽) 나 자신이 이미지보다는 텍스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이라는 걸 익히 알고는 있지만, 새삼 뼈저리게 느낄 때가 바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다. 미술관이란 그림을 보러 온 곳일진대, 나는 그림보다 그 옆에 붙어있는 설명 패널을 죽어라 읽어대곤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 설명을 통해서 이 그림이 어떤 맥락에서 그려졌고 어떤 시기,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야 그림 전체가 제대로 된 의미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니 말이다. 이건 내가 초상화나 풍경화는 즐기되 추상화로 넘어가면 맥을 못 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 나에게는 더 반갑다. 조선시대의 풍속화 23점, 그것도 내 주요 관심분야인 음식과 관련된 풍경을 다룬 그림들만 모아서 그 그림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풍속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도인 이 책, 그 시도만으로도 반가울진대, 저자는 이를 단순히 새로운 시도로 끝낸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들은 ‘음식이 있는 풍경’을 그렸을 뿐 음식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므로, 이 그림들을 통해 음식사(史) 그 자체를 복원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시도다. 그러나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했듯 자세히 들여다보면 짐작은 가능하며, 그 짐작을 기존에 알려져 있는 조선 음식의 상식과 결부시키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조금 더 명확한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다.

그림과 문헌 사이를 수없이 오가야 했을, 읽는 이로서는 반갑지만 쓰는 이로서는 참으로 중노동이었을 노력 덕분에, 저자는 남아있는 그림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음식 문화만이 아니라 음식과 관련된 생활상을 아주 성공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해내었다. 숭어찜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인 어부의 점심시간, 숯불에 구운 쇠고기에 술 한잔 마시려 바깥 추위를 무릅쓰고 한밤중에 모여앉은 양반님네들, 시집와 큰 상 받고 앉았지만 앞으로의 시집살이 생각에 얼굴은 밝지 않은 새색시의 모습까지. 우리의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우리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잡히지 않았던 모습들이 빼어난 그림과 친절한 설명 덕분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라는 이 책의 제목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책의 전반적인 도판이나 지질도 책 내용 못지 않게 마음에 들었고, 나처럼 ‘그림눈’ 어두운 독자를 위해 그림 전체를 일단 한번 보여준 다음 세부만을 다시 따서 관련되는 내용 옆에 배치해준 친절함도 돋보였다.

갓을 쓴 두 젊은 양반이 각각 대전별감. 꼽추 하인과 맞붙어 술 한잔 먹기를 의논하고, 술 장사꾼은 막걸리를 잔에 부어 이들을 유혹한다. (27쪽)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많은 시간을 그 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보낸다. 그 시간은 항상 즐겁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예전과는 다르게 가슴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이토록 화려한 ‘남의 문화’에 비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나, 그리고 가지고 있는 우리 것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나 하는, 예전에는 애써 눈감으려 했던 부분에 더 이상 눈감아지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가 덜 가졌거나 우리가 가진 것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우리 것에 내가 과문했던 것이 아닌가를 새삼 자문해보게 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 라는 말대로, 우리 것에 대한 내 사랑이 덜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별하는 그림과 설명을 읽은 후 찬찬히 바라보는 그림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 더 늦기 전에 언제나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자꾸 미루게 되는 우리 박물관을 다시 찾아 이 책에 나온 정겨운 우리 그림을 만나야겠다. 여러 모로 참 고마운 책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리비’님은
역사를 공부했고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살면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늘 도서관과 서점을 꼽아왔는데, 요 몇 년간은 축구장이 맹렬한 기세로 그 자리를 위협합니다. http://blog.naver.com/livia0412
술잔 옆에는 사각 함에 노란색의 음식이 놓였다 - 책 속 밑줄 긋기

술잔 옆에는 사각 함에 노란색의 음식이 놓였다. 딱히 그림만으로는 그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상상을 해 보면 담긴 그릇으로 보아 떡 아니면 과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걸리와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떡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술꾼들은 술과 단맛이 상극이기에 과자를 함께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의 색깔처럼 금빛이 나는 떡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떡으로는 인절미를 꼽을 수 있다. -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엿판 들고 태평성대를 꿈꾸다, 유숙,「대쾌도」’ (28쪽)

따라서 이 그림의 구체적인 제목은 당연히 「내국의관채유(內局醫官菜乳)」라고 붙여야 옳을 듯싶다. 곧 내의원의 의관들이 임금에게 바칠 타락죽의 원료 중 하나인 생우유를 마련하기 위해서 암소의 젖을 짜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타락죽을 먹을 임금 역시 영조일 가능성이 많다. 영조는 83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52년 동안 재위하여 역대 왕 가운데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타락죽이 허약한 노인에게 알맞은 영양보충제로 쓰였으니, 이 그림은 아마도 조영석이 죽기 10년 전인 1750년대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때 영조는 이미 50대 후반의 나이로 초겨울에 타락죽으로 원기를 북돋워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관들이 타락죽을 만들기 위해 생우유를 짜는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그려둔 이 그림은 티끌처럼 작은 일도 기록해두면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 ‘조선시대, 궁중에서 우유를 짰다, 조영석, 「채유」’ (101쪽)

비록 근대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미 서양이 세계적 질서의 중심에 있던 당시에 조일통상장정기념연회의 형식과 내용이 보이는 차이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하겠다. 즉 내용content은 서양식의 식기, 음식, 술, 탁자, 의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형식context을 구성하는 좌석의 배치와 식사의 규칙은 조선식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1883년의 조선 왕실과 외교통상 업무를 맡은 통리아문의 관원들이 인식한 서양 혹은 근대에 대한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유의 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식탁 위의 서양 음식이 말하는 것, 안중식,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 (145쪽)

음식의 탄생과 유행 등을 통해 한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주영하 교수
주영하 교수
196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인 풀무원김치박물관에서 음식사연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알게 됐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中央民族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속학과 음식사를 주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전근대와 근대의 ‘사유와 생활’이 혼재되어 있는 19세기와 20세기라는 시간 축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등이, 공저한 책으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등이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