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여름이 시작되던 ‘파랑새 소극장’을 기억한다. 또 가을날의 ‘학전’을 기억한다. 그 길가마다 내 젊은 날을 떼어낸 조각들이 있고, 그의 노래들이 있다. 학전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보고 나오던 날, 대학로의 그 넓은 횡단보도에는 작은 키의 그가 신호등 아래 홀로 서서 밝게 웃고 있었다. 기타도 없이, 무엇 하나 손에 든 것도 없이, 그렇게 빈손인 채, 그는 어디로 가기 위해 그곳에 서서 나와 마주쳤을까……. 누구를 향해 그렇게 웃고 있었을까…….
아직도 노래 부르고 있을까?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노래들을 만들어 세상에 ‘부치지 않은 편지’로 띄우고 있을까? 그가 있는 곳에도 바라볼 강이 있고, 간직할 노을이 있을까? 귓가를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이 있을까? 이제쯤엔 그 어디에라도 마음 쉴 곳 하나 마련했을까? 내 젊은 시절처럼 편지 받을 주소 한 줄, 편지 띄울 우표 한 장 없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그렇게 김광석을 다시 들으며 내 젊음의 기억 하나가 죽어가는 것을 본다. 결코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젊음이다. 문득, 계절은 수상하고 오늘 새벽엔 생각지 못했던 비가 내렸다. 사랑은 없었고, 약속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한 채 깨어졌다. 아련한 것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던 김광석의 노래뿐…….
그가 죽음을 선택했던 그 겨울날, 선배 두 명과 술을 마셨다. 말없이 그의 노래를 듣던 선배는 “김광석 개XX…….”라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한 선배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나는 많이 취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선배를 따라 ‘김광석 개XX…….’ 욕할 수밖에 없었다. ‘나쁜 새끼. 왜 죽었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 집으로 돌아오던 전철 안에서 누군가 “오늘 김광석이 죽었대.”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전철 창가에 얼굴을 묻고 어쩔 수 없는 몸짓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늘 꿈꾸기를 판 하나만 더 내놨더라면 하는 마음이었다. 더 바라지 않았을 테니 판 하나만 더 내놓고 떠났더라면 했다. 세상에 내가 모르던 그의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가 죽은 후 라디오에서였다. 그 노래, ‘부치지 않은 편지’를 처음 들었을 때 난 어쩐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남겨서는 안 될 노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앨범 작업을 끝냈어야 했다. 그를 추억하고,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작별의 선물을 남기고 갔어야 했다.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다. 김광석이 찡그린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사진가 임종진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가 김광석을 추억하는 에세이집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냈다는 것도 그러했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글자 하나하나를 눈이 아니라 귀로 읽는다. 그가 들려주는 김광석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읽는다. 당신도 그러했구나, 고개 끄덕이다가 나 또한 그러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추억하는 자, 임종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술집에서 같은 노래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김광석의 기타가 있던 공연장에서 함께 노래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임종진이 사진과 글로 남긴 추억이 노래처럼 들려온다. 그래, 이러면 됐다. 충분하다. 김광석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떠났으니까. 아직도 가슴 아프게 들을 노래가 있으니까. 판 하나쯤 더 내놓지 않았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남겼으니까……. 그것을 일깨워 준 임종진의 사진들이 참으로 눈물겹고 고맙다.
다시 김광석의 사진을 본다. 그는 사진 속에서 영원히 서른 세 살이다. 그게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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